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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무문, 길을 멈추다

KBS News 370,763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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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정권과 산업화, 민주화의 중심에 서서 우리 현대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큰 산, 거산 김영삼. 최연소, 최다선 정치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영광과 시련, 성공과 좌절을 반복한 굴곡 많은 삶을 산 정치인.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74년 신민당 총재 취임연설) : "나는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나에게 준 이 영광이 결코 영광이 아니요, 십자가로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영삼 前 대통령이 22일 새벽 0시 22분. 파란만장한 88년 일기를 마치고 서거했습니다. 부인 손명순 여사를 제외한 가족과 의료진이 자리를 지킨 가운데 조용한 임종을 맞았습니다. 인터뷰 정연국(청와대 대변인) : "(박 대통령은)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습니다.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제 둘이 어려서 요절하는 바람에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멸치잡이 어장집 아들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일제 식민지, 가난한 나라, 더 열악한 농촌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란 그는 천진난만한 개구장이에서 의협심 강한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학창 시절 일본인 학생과 마찰을 빚어 정학을 당하고, 일본인 교장의 설탕 10부대를 빼돌린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인터뷰 박기영(김 전 대통령 중학교 선배) : "그때 우리는 2학년이고 YS는 1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가만 있는데 YS가 나서가지고 그 설탕 갔다가 이웃 사람 나눠주고 그 흙탕물 요즘 말하면 개고랑인데 개고랑 흙탕물로 다 집어넣고..." 조그만 섬 마을 시골 소년은 책상 머리맡에 "미래의 대통령은 김영삼"이라 써붙이며 정치 지도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선을 봐 부인 손명순 여사를 만나 결혼합니다. 마산에서 고무회사를 운영하던 집안의 딸인 손명순 여사는 평생 조용한 내조로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합니다. 녹취 김영삼 전 대통령(2011년 3월, 결혼 60주년 회혼식) : "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민주화를 이룩해 낸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30년 전, 아니 60년 전 손명순 여사를 제 아내로 맞이한 일입니다." 54년 만 25살의 나이에 3대 민의원 선거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녹취 1954년 대한뉴스 : "역사적인 막을 올렸습니다. 홍안(붉은 얼굴)의 김영삼 의원이...투표는 질서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인 기록들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화려함보다는 험로에 가까웠습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 입당 7개월만에 탈당해 민주당으로 당적으로 옮겼습니다. 반독재 투쟁이란 험로를 걷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정치의 거두로 성장합니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집회. 가두시위로 서대문형무소에 23일 간 수감됐습니다. 1965년 만 37살의 나이로 첫 야당 총무로 선출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저항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한들에게 초산으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6월, 귀가하던 길이었습니다. 인터뷰 김현철(김 전 대통령 차남) : "(2013년 회고 인터뷰) 차가 보니까 완전히 분화구예요. 분화구. 막 그냥 이 거품이...차 본네트부터 유리창(까지)...완전히 차가 엉망입니다. 결국 그게 초산이었어요." 1970년 43살의 나이에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면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듭니다. 같은 40대인 김대중, 이철승 후보와의 경쟁에서 1차에서는 승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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