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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다해 주님 봉헌 축일 – 구원에 이르는 봉헌은 오직 하나뿐: 용서를 위한 봉헌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봉헌이 아닙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성모님께서 장차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구약에서의 봉헌과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봉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봉헌의 목적은 첫째, ‘저는 당신 것이고 제가 가진 것도 당신 것입니다.’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바쳤던 제물이 번제와 곡식 제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속죄’입니다. 빚을 진 상태로는 친교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탕감해주더라도 그분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자신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속죄제나 보상제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런 봉헌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신약의 봉헌은 반드시 ‘용서’가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타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시며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신을 한 신부님’(2019)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니엘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소년원 겸 교정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본당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돕게 되면서 ‘사제의 길’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살인 및 폭력 전과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답을 들었고, 결국 다른 직업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출소 후 노동 현장으로 파견되던 중, 다니엘은 시골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고, 우연히 그곳 본당 신부님을 만나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다니엘은 내면에 깊은 갈망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누군가가 “본당 신부님 맞나요?” 하고 묻자, 그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예, 제가 신부입니다.”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그리고 빈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 마을의 임시 ‘신부’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의외로 진솔한 그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여러 주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운전자’ 역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시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운전자를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표시가 있지만, 정작 그 ‘가해자’였던 운전자는 묘지에조차 들어오지 못한 채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은 처음에는 이 사건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용서받지 못함의 고통”을 잘 아는 그였기에, 점점 그 가족과 죽은 운전자를 묻지 못한 채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신경 쓰였습니다. 다니엘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 운전자를 위한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자.” 모든 마을 사람이 반대하고, 심지어 다른 사제나 경찰관도 “장난질이 너무 심하다.”라며 그를 몰아세우지만,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례식 당일,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주민들은 장례식장에 몰려와 고성을 지릅니다. 이즈음에 그의 신분도 조금씩 들통이 나기 시작합니다. “가짜 신부가 무슨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이딴 식으로 저 인간까지 구원받게 해 줄 순 없어!” 다니엘은 위축되면서도, 용기를 내어 운전자의 관이 놓인 곳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들어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저 역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건,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회를 주셨고, 저도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 사람에 대한 증오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죽은 이에 대한 복수나 증오는 우리 모두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다니엘은 장례식을 시작하며 조용히 기도문을 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또는 해당 지역 미사 의전)를 이어 갑니다. 이 순간, 관 앞에서 울부짖는 운전자의 가족을 보고 몇몇 주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사제가 아닌 저 사람(다니엘)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까지 마음 돌리게 하나…” 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그의 진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묵묵히 참여하기 시작하지요. 장례식을 마치고 다니엘은 신자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고 문신이 새겨진 몸을 드러낸 채 그들을 조용히 떠나갑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먼저 사제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하지 않은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곧 에덴동산에서의 가죽옷을 선물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제복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위한 봉헌을 의미합니다. 그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 합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봉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감옥에 갇히도록 내어놓겠다고 말한 장면(창세기 44,33 참조)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모습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지만, 되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양식을 베풀었고(창세기 50,19-21 참조),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주시는 대신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창세기 3,21 참조). 누군가의 죄를 덮어 주기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된 것은 최초의 봉헌을 상징합니다. 신약에서는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도, 세상의 조롱 속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려고 몰래 파혼하려 했습니다(마태오 1,19 참조).
구약의 유다와 요셉이 살아 낸 봉헌과 희생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완성해 주신 속죄와 사랑으로 이어지며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봉헌은 더 이상 의무적 제사가 아니라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봉헌’이 됩니다. 이 봉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롭고 영원한 봉헌입니다. 나는 이웃의 죄를 덮어주는 봉헌을 하며 미사에 참례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참다운 신약의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