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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뇌가 존재하는 이유: 움직임

김주환의 내면소통 55,874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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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뇌과학자들은 인간에게 뇌가 존재하게된 근본적인 이유가 움직임에 대한 예측을 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자기 움직임에 대한 결과를 예측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의도를 생성해내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적절한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움직임에 대한 이러한 예측과 예측 오류를 최소화 하는 능동적 추론을 담당하기 위한 기관이 뇌입니다. 나아가 움직임을 위한 "의도"의 생성을 위해 뇌가 지니게 된 독특한 기능이 바로 의식(consciousness)입니다. 환경 속에서 움직임을 통제하고 조율하며 결과를 예측하려면 일정한 '주체'(agency)가 떠오르게 되는데 그것이 곧 자의식(self-consciousness)입니다. 뇌과학자들은 스스로의 움직임에 대한 '중앙화된 예측(centralized prediction)'이 곧 자아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나'는 나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조절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근력 훈련의 핵심에 '움직임'이 있는 이유이고, 마음근력을 강화하기 위한 내면소통 명상의 핵심에 움직임 명상이 있는 이유입니다. (출처: 내면소통 480 - 488) 내면소통의 움직임 명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움직인다는 것이 우리 의식과 뇌에 있어서 얼마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물에 뇌가 있는 이유는 ‘움직임’ 때문이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뇌가 필요하지 않다. 지나스는 고착성 해양동물인 우렁쉥이류의 예를 든다. 우렁쉥이류의 대표적인 것이 멍게다. 멍게는 동물임에도 마치 식물처럼 평생 바위에 붙어서 살아간다. 따라서 뇌가 없다. 그러나 멍게는 동물이다. 알에서 깨어난 어린 시절에는 올챙이처럼 자유롭게 헤엄치며 다닌다. 올챙이 시절의 멍게는 주변의 환경을 인지하는 감각신경도 있고, 빛을 감지하는 신경계도 있으며, 원시적인 척추도 있고, 당연히 뇌도 있다. 움직이기 때문이다. 성장한 후에 적당한 바위를 찾은 멍게는 자기 머리를 바위에 파묻고 고착된다. 그러고는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움직일 필요가 없고 뇌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바위에 고착된 멍게는 곧 자기 뇌와 척수를 소화해서 흡수해 버린다. 스스로 자기 뇌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멍게의 성장 과정은 동물의 뇌와 신경계가 바로 ‘움직임’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의 뇌에는 움직임과 관련된 예측을 계산하는 내적모델이 있다. 특정한 움직임을 하기 전에 내적모델은 미리 움직임을 계획하고 마음속으로 흉내를 내어 움직임의 결과(가령 손의 위치와 속도 등)를 예측한다. 이러한 내적모델 덕분에 우리 몸은 특정 상황에서 좀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다. 만약 내적모델 없이 외부자극에 의한 피드백만으로 움직임을 조절한다면 반응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적모델은 또한 ‘예측과 결과의 차이’라는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러한 예측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움직임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 기회를 얻는다. 내적모델의 존재는 간지럼 실험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내가 내 손바닥을 건드리는 것은 별로 간지럽지 않으나 다른 사람이 같은 자극을 주면 간지럽게 느껴진다. 그 이유도 바로 감각-운동 신경계와 관련된 예측 모델 때문이다. 내가 내 손바닥에 어떤 자극을 줄 때 나는 나의 손가락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내 손가락의 움직임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간지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자극을 줄 때는 내가 그러한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간지럼을 느낀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월퍼트 연구팀은 로봇팔을 통해서 피험자가 자신의 손바닥에 자극을 주는 일련의 실험을 진행했다. ... 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나를 간지럽히느냐 아니냐가 간지러운 정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추론 시스템이 주어진 자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간지러운 정도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자기가 자기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자극이 시간 차이를 두고 전달되거나 방향을 바꿔 전달되면 그 자극은 뇌가 예측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정보를 전달해주기 때문에 간지럽게 느끼는 것이다. 손바닥 간지럽히기 실험을 통해 월퍼트 교수는 움직임과 자극에 관한 추론을 담당하는 내적모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움직임과 시공간 인식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몸에서 찾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몸의 움직임 자체를 지각 및 인지와 통합해 인간 본성의 기반으로 보기 시작했다. 움직임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철학뿐 아니라 생물학과 진화론의 관점에도 매우 중요한 분석의 틀을 제공하며 뇌과학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인간 의식에 경험의 조건으로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고 여겨졌던 칸트식의 시간 개념 역시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간이 있기에 움직인다기보다는 움직임의 가능성이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들어낸다. 시간이 흐른다기보다는 나의 움직임에 대한 의도와 움직임의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시간의 흐름으로 느끼는 것이다. 움직임은 물론 공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뇌가 공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움직임을 통해서다. 공간은 그 자체로는 인지되거나 경험되지 않는다. 공간은 인식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공간을 점유하는 사물과 그 사물의 움직임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공간에 대한 감각을 생성해낸다. 움직임의 가능성이 공간을 생성해낸다. 의식이 움직임의 가능성을 공간으로 추론해내는 것이다. ... 공간이 있기에 움직일 수 있다기보다는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공간이라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즉 움직임과 움직임의 가능성이 공간을 만들어낸다. 움직임이 전제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마치 시각중추가 전제되지 않는 빛이란 없으며, 청각중추 없이는 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공간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텅 빈 공간이란 없다. 우주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물질과 반물질, 에너지와 암흑에너지(dark energy)로 가득 차 있다. 우주에 ‘아무것도 없음’이란 없다. 텅 빈 공간이라는 것은 움직임의 가능성에 의해 구성된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공간을 공간 자체로 이해하기란 어렵다. 소리 없이 고요함을 고요함 자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소리의 경험이 있어야 고요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문득 소음이 멈췄을 때 비로소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소리의 부재만이 고요함을 탄생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물의 부재에 대한 경험이 공간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 움직임 명상은 움직임의 고요함과 공간감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훈련이다. 움직임에 대한 자각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움직임 명상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시츠-존스톤(Maxine Sheets-Johnstone)의 말을 들어보자. “움직임은 정지되어 있음(stillness)이 없는 지속적인 고요함의 현존(continuing presence of silence)”이다. 고요함은 그래서 다이내믹하다. 역동적인 호흡이 그 고요함을 관통한다. 살아 있는 전체로서의 몸의 역동성이 고요함을 관통한다. 그 역동성은 살아 있는 의미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공명이며 몸에 의해서 드러나는 공명이다. 그렇기에 움직임의 고요함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 움직임에 대한 예측과 결과에 대한 의미부여는 의식으로 하여금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을 갖게 한다. 시간의 축이 선험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그 맥락에서 움직임이 이뤄진다기보다 움직임에 대한 추론과 스토리텔링이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의식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 시간은 스토리텔링의 산물이다. 시간이나 공간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것도 아니고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지구상 언어의 절반가량에는 과거나 미래형 시제가 없다. 예컨대 아마존 지역이나 호주 원주민 부족들은 사물이나 사건으로부터 독립된 시간의 개념이 없다. 이들 문화에는 사건이나 사물의 순서와 관계만 있을 뿐 시간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의식의 독특한 모델링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물리학자 로버트 란자(Robert Lanza)가 간결하게 요약했듯이, 시간이나 공간은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창출해낸 ‘생물학적 실체’다. 란자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은 물론이고, 그러한 사물이나 사건이 존재하는 시간이나 공간마저도 우리의 의식에 의해서 생산된 하나의 틀(matrix)이다. 하나의 생명체는 그 자신이 이 우주의 중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각각의 생명체는 자신이 존재하는 우주를 구성해내며, 따라서 그 우주에서는 자신이 중심이다.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는 것은 항상 행위를 전제로 해서다. 움직임은 본질적으로 지각에 선행한다.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의 여부나 움직임의 가능성을 유발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지각하는 방식과 지각의 범위가 결정된다. 이것이 폰 윅스퀼(Jakob von Uexkull)이 말하는 ‘움벨트(umwelt)’의 의미이며, 깁슨(James Gibson)이 말하는 ‘어포던스(affordance)’의 의미다. 움직임의 기반인 의식이 어포던스를 통해 움벨트를 생산해내어 대상을 지각한다. ----- #내면소통 #명상 #내면소통명상 #고유감각훈련 #의도 #의식 #움직임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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