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온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면 어떠한 노력을 해야할까요?
역경이나 어려움도 잘 이겨내는 인내심을 발휘하려면 또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노력'이나 '훈련'은 목표를 정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위해서는 굳은 의지와 강력한 의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음근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이러한 일반적인 노력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애쓰지 않는 노력(effortless effort)"입니다.
강력한 의도에 입각한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의도도 모두 다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명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근력 훈련의 핵심에 명상이 있는 이유입니다.
명상은 있는 그대로 머무는 것입니다.
명상은 의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명상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퍼트 스파이라가 말하는 애쓰지 않는 노력입니다.
이러한 명상은 편도체 안정화와 전전두피질 활성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내면소통 이론의 핵심입니다.
그 결과 평정심이 찾아옵니다.
그 결과 어려움이나 고통을 무난히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도 찾아옵니다.
(출처: 루퍼트 스파이라, "사물의 투명성", 근간)
명상은 활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활동의 중단입니다.
결국 명상과 관련된 어떠한 절대적인 참도 말할 수 없습니다. 명상을 활동의 중단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일어나기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 마음은 명상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명상이 활동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명상이 활동의 중단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이해는 명상은 우리가 하는 무언가라고 믿는 신념을 뒤흔드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명상은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이전에 우리가 명상이라고 여겼던 활동은 자연스럽게 끝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명상은 활동이 아니라는 이해는 그 목적을 다하게 되며 또한 버려질 수 있습니다.
가시로 가시를 제거하고 나면, 둘 다 버려집니다.
꽉 쥔 주먹을 예시로 들어 명상이 활동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편 손을 천천히 꽉 쥘 때 우리는 손을 쥐는 것과 쥔 손을 유지하는 것 모두 애를 써야 합니다.
이 쥔 손을 한동안 유지하면, 근육은 이 새로운 자세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세를 유지하려고 계속해서 미세하게 애쓴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누군가가 우리에게 손을 펴라고 하면, 우리는 손을 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손을 펴는 어느 단계에서, 손을 펴려고 새롭게 노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더 이상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기존의 노력을 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손을 펴려는 외관적 노력이 실제로는 손을 쥐던 원래의 노력을 이완하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노력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던 것은 실제로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명상도 이와 비슷하게 작용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열려 있고, 끝없으며, 자유로우며, 의식하며, 스스로 빛나며, 자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매 순간 겪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은 자신을 수축시킵니다. 의식은 자신을 움츠려 몸과 마음이라는 좁은 틀에 들어가고, 광활한 공간 속 아주 작은 위치와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 짧은 순간으로 자신을 한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이 매 순간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 근본적인 자기 수축입니다.
의식은 자신을 한정적인 개체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세상을 자신 바깥에 투사하는 것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래서 의식이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마치 대응하는 활동, 즉 의식이 자신을 찾으려면 해야 하는 무언가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수축을 이완하는 것이 손을 펴는 것처럼 하나의 활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마다, 개별적인 개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마다, 자신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경험의 완전한 영역에 선택이나 선호 없이 자신을 열 때마다, 의식은 자기를 회피하는 습관, 즉 자신의 실재를 회피하는 습관을 자신도 모르게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식은 자신 속에서, 자신으로 머무르는 것에 더욱 익숙해지며, 자신이 아닌 것으로 가장하지 않게 됩니다.
스스로를 움츠리며 개별적인 개체로 들어가고자 하는 충동은 계속해서 뒤흔들립니다. 의식은 자신의 안에 머무릅니다.
살피고, 찾고, 회피하고, 가장하고, 움츠리려 하는 충동은 계속해서 나타나지만, 의식은 더 이상 충돌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의식은 충동을 인식하지만 더 이상 충동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그 결과, 충동의 빈도와 격렬함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의식은 더 이상 자신을 벗어나 사물로 향하지 않습니다. 의식은 자신 속에 머무르며 사물은 의식으로 다가옵니다. 사물, 즉 사유, 느낌, 지각은 의식으로 다가오며, 의식에 나타나며,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의식은 더 이상 몸, 마음,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자신을 잊을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은 모든 경험 속에서 빛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 옵니다. 열려 있고 자유로우며 한계가 없는 의식은 곧 우리의 내밀한 자아입니다. 이는 언제나 오롯한 우리 자신이었고, 앞으로도 늘 오로지 자기 자신일 것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의식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떠난 적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의식은 자신에게 돌아가거나 자신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단지 자신의 인식, 즉 자신이 늘 오로지 자신 속에서 자신으로 머물러왔다는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의식은 이전에 자신이라고 여겼던 개별적인 개체가 사실은 이따금 자신이 하는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은 이따금 자신이 하는 것처럼 보였던 활동, 즉 우리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그 활동이 사실은 늘 그대로인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의식은 명상이란 오고 가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상태가 오고 가는 곳임을 깨닫습니다.
명상은 단지 의식의 자연스러운 현존으로서, 항상 존재하며 모두를 포용합니다. 또한 변함이 없고 끊임이 없으며 무한하고 스스로 빛납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아는 것이며 자명합니다.
한정적이며 개별적인 개체의 관점에서 보면, 명상에 대한 모든 서술은 그 개별적인 개체가 해야 할 무언가로 나타납니다. 개별적인 개체가 의식이 자신에게 품는 신념과 느낌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확히 보이는 순간, ‘명상’으로 여겨졌던 과정이나 행동을 서술하는 것처럼 보였던 기존의 말들, 즉 무언가를 하라는 지시처럼 보였던 그 말들이 이제는 단지 사물의 모습에 대한 서술로 이해됩니다.
무지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우리의 모습이고 ‘명상’은 우리가 이따금 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그저 자신으로서 있는 그대로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대로 있으면서 마음, 몸, 세상이 간섭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도록 둡니다.
만약 간섭이 있다면, 간섭은 마음의 활동 중 일부로 이해되며 완전히 그대로 허용됩니다.
우리의 대상적 경험은 사유와 이미지, 감각, 지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사유와 이미지를 마음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감각을 몸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지각을 세상이라 부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마음, 몸, 세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 감각하기, 지각하기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지각입니다. 우리의 지각 바깥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저 바깥에’ 있는 세상을 지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지각하며, 모든 지각은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명상에서 우리는 생각하기/감각하기/지각하기가 매 순간 무엇이든 되도록 놔둘 뿐입니다. 생각하기/감각하기/지각하기는 늘 움직이며 늘 변화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거쳐 흐르도록, 나타나도록, 머무르다 사라지도록 놔둘 뿐입니다. 사실, 어쨌든 그것이 일어나는 전부입니다.
생각하기/감각하기/지각하기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나’라고 부릅니다. ‘나’는 의식하며 목격하는 현존입니다. ‘나’는 매 순간 경험되는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목격하는 현존이 의식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그러합니다. 그것을 평온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러하지요. 그것을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늘 깨어 있지요. 그것을 끝없고 개인적이지 않도록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러하지요.
그리고 마음, 몸, 세상을 평온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늘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우리는 그대로 있으면서 마음, 몸, 세상을 그대로 둡니다.
그렇게 하면서 마음, 몸, 세상이 서서히 자신의 진정한 자리로 돌아가며 이들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사실 이들은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진정한 자신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들이 멀리 있으며, 개별적이며, 다르다고 상상하는 것을 멈출 뿐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멈춥니다.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명상’은 우리의 모습이고 ‘사람’은 우리가 이따금 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명상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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