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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 조상님 시제

chonskim푸른잎새 11,890 lượt xem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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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7.12. 2.(토)10:00
장소 : 경남 함양 대광리 종묘원
대상 : 김해김家 삼현파 문중의 5대~11대조상
참석 : 김영수, 김동수, 김동호, 김윤수, 김기태, 김작용
김해윤, 김경수, 김상수, 김백수, 김천수, 김광수
김성수, 김봉수, 김봉민, 김상길 외 식솔 다수

김해김씨(金海金氏, 가락)

[유래]
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김해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계 파]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8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경파(京派;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한다.
- 사군파(四君派;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한다.
- 삼현파(三賢派; 극일, 일손, 대유) :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한다.

-삼현파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세조인 김관(金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김언유(金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김언유의 아들 김현성(金玄成)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덕승(金德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김예직(金禮直),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김진희(金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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