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알아차림(사띠), 통찰명상(위빠사나), 집중명상(사마타) 등 불교 전통의 대표적인 명상법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내면소통 571; 637 - 642)
특정한 일에 집중하는 인지 과정은 중앙수행네트워크(CEN)에서 주로 담당하지만, 창의적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 문제해결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디폴트모드네트워크(DMN)와 주로 관련된다.
자기조절력에 해당하는 집중력이나 끈기를 발휘하려면 중앙수행네트워크가 필요하지만, 자기동기력에 해당하는 창의성과 문제해결력을 발휘하려면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마음근력이 강한 사람은 이 두 가지 신경망을 균형 있게 넘나든다.
불교의 전통적인 명상의 두 가지 기본적인 방법 역시 이 두 가지 신경망과 관련된다.
흔히 ‘집중 명상’이라 불리는 사마타(samatha) 수행은 특정한 지각 대상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고요한 선정(禪定)을 추구한다.
넓게 보면 화두선도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하나의 대상에 지속해서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서는 중앙수행네트워크가 작동해야 한다.
반면에 ‘통찰 명상’이라고도 불리는 위빠사나(vipassanā) 수행은 특정한 지각 대상을 설정해놓지 않고 그저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폭넓게 주의를 열어놓는 명상(open monitoring meditation)이다.
위빠사나라는 말 자체가 두루(vi-) 본다(passana)는 뜻이다.
이렇게 폭넓게 주의를 열어두는 것은 디폴트모드네트워크와 중앙수행네트워크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통찰력과 창의성이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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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어 사띠(sati)는 지금(now), 주의(attention), 기억(memory), 현존(presence) 등의 의미를 포괄하는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스므르띠(smrti)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이제 금(今)’과 ‘마음 심(心)’을 합친 글자인 ‘생각 념(念)’에 가장 가깝다. 사띠는 지금 여기서 나에게 일어나는 내 경험이나 생각이나 감정이나 느낌을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바라본다는 뜻이다. 즉 사띠는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 지속적으로 주의를 두어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나의 경험을 매 순간 놓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리는 것이 사띠다. 마코프 블랭킷 모델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띠 명상이야말로 전형적인 내면소통의 한 형태다.
사띠 명상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명상이라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의 뇌는 능동적 추론의 기계다. 감각정보들을 기반으로 가추법에 따라 추측하고 구성하는 것이 뇌가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에는 ‘있는 그대로’라는 대상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인간의 뇌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전통적으로 명상에는 크게 통찰 명상과 집중 명상이 있다. 그런데 ‘통찰’과 ‘집중’이라는 말 때문에 자칫 오해하기 쉽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통찰이나 집중과는 상당히 다른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팔리어 위빠사나(vipassanā)의 뜻 자체가 ‘두루두루(vi-)’ ‘꿰뚫어보다(passana)’이다. 영어로는 보통 ‘insight’로 번역하고,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통찰’이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통찰 명상’이 된다.
통찰 혹은 꿰뚫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본다는 뜻일까? 바로 내가 경험하는 온갖 사물과 사건들의 실체를 본다는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나에게 괴로움(dukkha)을 주게 마련이지만(일체개고), 세상 만물이 모두 변하는 것이어서 고정된 실체란 없다(annica)는 것(제행무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의식의 주체 역시 텅 빈 것이고(annata) 특정한 실체가 없다는 것(제법무아)을 꿰뚫어보는 것이 위빠사나다.
한편, 사마타는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팔리어 사마타(samatha)는 ‘고요함’, ‘평온함’을 뜻하는 ‘sama’와 ‘어떤 상태에 머물다’, ‘지키다’를 뜻하는 ‘tha’가 합쳐진 말이다. 즉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곧 사마타다. 영어로는 ‘tranquility’ 혹은 ‘calmness’로 번역하고, 평온한 알아차림tranquility awareness)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우리말로는 보통 ‘집중 명상’이라고 하는데, 사실 고요 명상 혹은 적정(寂靜) 명상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사띠) 명상에서도 ‘주의를 집중한다’는 등의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나의 경험에 ‘집중’하는 것이 알아차림 명상이므로 사마타를 또한 ‘집중’ 명상이라고 하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무튼 사마타 수행자가 처음부터 대상 없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기는 어려우므로 보통 호흡이나 몸 또는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고요함에 이르는 방법을 쓴다. 그래서 사마타를 ‘집중 명상’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사마타의 핵심은 집중보다는 고요함과 평온함에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수행을 통해 두 가지 마음 상태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다. 하나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인 ‘사마타’이고, 다른 하나가 사물을 꿰뚫어보는 통찰의 상태인 ‘위빠사나’다.
고타마는 제자들에게 수행을 지도할 때 ‘위빠사나’를 따로 떼어서 통찰 명상을 하라고 강조한 적이 없다. 제자들에게 수행을 권할 때 항상 ‘선정(禪定: jhana)’에 들라고 권했을 뿐이다.
초기 경전 전체를 살펴봐도 위빠사나를 명상의 한 방법으로 별도로 가르치거나 하는 부분은 없다. 위빠사나라는 말 자체가 간혹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항상 사마타와 함께 언급되었다. 그것도 사마타 수행의 대안이나 별도의 수행 방법으로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마타 수행이 위빠사나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강조된 적도 없다.
초기 경전에서는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함께 닦아야 하는 마음 상태의 두 측면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사마타 숫따》에서는 “수행자는 스스로 사마타를 얻었다고 생각되면 사마타를 통해 위빠사나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만약 위빠사나를 얻었다고 생각되면 위빠사나를 통해 사마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만약 둘 다 못 얻은 상태라면 “자기 머리에 불이 붙은 사람이 당장 불을 끄기를 원하는 정도로 간절하고도 쉴 새 없이 적극적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또 둘 다 얻었다면 계속 더 높은 상태에 오르기 위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꾸준히 갈고닦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을 알려주는 경전인 《아칸카 숫따》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 열 가지(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기, 지금 여기에 현존하면서 어떠한 두려움이나 번뇌나 괴로움도 겪지 않기 등)를 하나하나 성취하기 위해서는 계율도 완벽하게 지켜야 하고 선정에 드는 것도 게을리하면 안 되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열 차례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함께 닦음으로써 사선정(四禪定)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초기 경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제자인 아난다 역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둘 다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는 수행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정리해서 알려준다. 첫 번째는 사마타를 통해서 위빠사나로 가는 수행이고, 두 번째는 위빠사나를 통해서 사마타로 가는 수행이며, 세 번째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수행이고, 네 번째는 내면에 끊임없이 집중함으로써 저절로 깊은 내면으로 향하는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가는 수행이다. 아난다 역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수행의 두 측면이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같이 닦아야 한다는 것은 동북아의 대승불교에서도 강조된다. 2세기경에 쓰인 《대승기신론》은 대승불교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는 핵심 텍스트인데, 여기에서도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함께 닦아야 하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사마타는 마음작용이 멈춘 상태라 해서 한자로 ‘지(止)’로 의역하며, 위빠사나는 본다는 뜻의 ‘관(觀)’으로 의역하면서 ‘지관(止觀)’을 동시에 닦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한 상태가 되어야 밝고 환한 통찰력으로 나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觀)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것이므로 그로써 얻는 지혜가 곧 ‘반야지(槃若智)’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부해야 할 것 세 가지, 즉 삼학이 계(戒), 정(定), 혜(慧)인데, 계를 지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닦아 사마타(止)를 얻으면 정(定)에 도달하게 되고, 나아가 위빠사나(觀)를 얻으면 혜(慧)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지와 관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두 가지 수행 목표다. 이것을 ‘지관겸수(止觀兼修)’라고도 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도 한다.
지관겸수와 정혜쌍수는 고려의 지눌이 제창한 사상인데, 새로운 주장이라기보다는 가장 근원적인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지눌은 정혜쌍수를 기반으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했는데, 이는 한번 깨달은 뒤에도 계속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초기 경전의 내용과 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아칸카 숫따》에도 나오듯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계속 수행하면 깊은 선정(jhana)에 들어가게 된다. 지관을 통해 삼매(三昧)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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