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대학 #이승만 #윌슨대통령 #독립운동
1908년 가을 먼 아시아동쪽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청년 이승만이 프린스턴에 도착. 그는 훗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됩니다. 이승만을 맞이한 어네스트 홀 목사는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분으로 그를 프린스턴으로 유학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습니다. 어네스트 홀 목사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장 찰스 어드만의 지원으로 청년 이승만은 1908년 9월부터 정치학과 박사과정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덕에 그는 신학대학원인 칼빈클럽에서 무료로 숙식을 하며 지냈고 학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미국에 온 이래 가장 안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대학 총장이었던 우드로우 윌슨 총장은 이승만을 총장사택에 종종 초대하여 식사를 하고 딸들의 피아노솜씨와 노래를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공부하는 것 이외에는 매주 수차례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 동부 전역의 지역교회를 방문하여 자신이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으며 조선의 선교상황 어떤지를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조선에서부터 온 선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죠. 그리고 그 댓가로 몇불의 사례를 받았고 그돈을 생활비에 사용하던가 선교비로 보냈습니다. 초기의 그의 활동은 대부분 선교사업과 관련되었지만 점차 독립운동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졸업후 이승만의 윌슨총장과의 인연은 계속되어 한때 대한민국의 운명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올뻔 했었죠. 1919년초 1차 대전의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 예정이 었습니다. 이승만은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습니다. 학창시절 스승이었던 윌슨총장이 이제 대통령이 되어 평화회의를 주재할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의 역할을 이용하여 한국의 독립의지를 표출하려고 했던것이죠.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을 직접 만나 설득하려했지만 실망스럽게도 윌슨은 내무장관을 통해 파리에 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달했습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게 여권조차 발급해주지 않아 이승만은 커다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위임통치 청원서라는 문서를 보내어 파리평화회의 제출하기를 바랬지만 이또한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문서는 훗날 커다란 정치적 논란만을 일으키기만 했습니다. 결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는 실망과 좌절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