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그곳, 요하 서쪽의 고구려성을 찾다
요하의 강줄기는 중국대륙을 요동과 요서로 나누는 기준. 2편은 요하 건너 서쪽의 북경으로 향한다. 취재팀은 사신길을 연구하는 건양대 이철성 교수와 여정을 함께했다.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영토를 요동지역에 한정시켜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요하 서쪽에 10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취재진은 요하 서쪽에 있는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고구려는 물론 옛 고조선의 영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던 요서 지역의 유적. 한때 이곳을 장악했던 우리의 역사를 확인한다.
- 명· 청 교체의 현장에 가다
다음으로 취재진이 간 곳은 명· 청 교체의 역사적 현장! 명· 청의 운명을 가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금주· 송산· 행산· 탑산. 당시 조선군도 청에 조총부대를 파병하며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 당시 청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에 효종)도 종군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이 요구한 파병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명은 어떻게 멸망하게 된 것인지, 역사적 현장에서 되짚어본다.
- ‘피서 산장’을 짓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박지원 일행은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황제가 있는 내몽고 지역으로 강행군했다.
만리장성 밖 내몽고 지역에 피서 산장을 지은 사람은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만리장성보다 열하에 짓는 피서산장에 관심이 많았다. 강희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역시 피서산장을 더 크고 화려하게 짓고 기능도 강화시켰다. 청나라는 몽고와 티베트 등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피서산장을 건설한 것이다. 박지원을 열하에 오게 한 것도 건륭제.
피서산장을 열하에 조성한 이유, 박지원은 열하에 와서 단숨에 깨닫는다!
- 박지원의 문화충격, 선진문화의 통로를 열다
박지원은 열하에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두 달간 머문다. 이곳에서 박지원은 청의 선진문물, 특히 수레와 배에 관심을 갖는다. 나아가 박지원을 비롯한 연행단은 새로운 과학 기술 문명에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 그는 연행을 통한 경험은 ‘연행록’으로 남아 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청 문화를 전파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이다.
HD역사스페셜 56회 – 박지원의 열하일기 4천리를 가다 2부, 청의 심장부 열하에서
황제를 만나다 (2006.8.4.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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