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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자아 - 내면소통의 핵심

김주환의 내면소통 273,298 lượt xem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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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소통 훈련의 핵심은 배경자아로서 혹은 배경자아와 함께 지금 이순간에 늘 현존하는 것입니다.
배경자아의 핵심은 알아차림입니다. 혹은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being aware of being aware).
기억자아와 경험자아의 스토리텔링을 한걸음 떨어져서 지켜볼 수 있을 때 강력한 마음근력을 얻게 됩니다.

기억자아의 다른 이름은 개별자아(separate self)입니다. 에고(ego)라고도 불리지요.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은 늘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는 것 뿐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순간,
미래를 계획하게 되고,
현존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에고는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미래에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겠다는 '나'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어낼수록 에고만 더 강화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특수한 상태에 이르겠다는 목표를 설정할수록 깨달음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됩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 늘 배경자아로서 현존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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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면소통 17-18쪽)
배경자아의 존재는 조용히 늘 우리의 의식 저편에 있기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 존재를 잊고 지낸다.
그저 경험자아나 기억자아가 나의 본모습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이기에 묘사하거나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늘 느낄 수 있다.

창문을 닫으면 방 안은 어두워지고, 창문을 열면 환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창문이 빛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단지 햇빛을 통과시켜줄 뿐이다.
경험자아는 마치 창문과도 같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햇빛을 통과시켜주는 존재다.
그 창문 위에 덧입혀진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커튼은 기억자아에 비유할 수 있다.
커튼은 제한된 개성과 정체성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창문이나 커튼은 빛의 원천인 태양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배경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경험자아를 통해 드러나고 기억자아에 의해 제한되거나 가려지지만, 배경자아는 늘 그대로 있다. 배경자아를 ‘나’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곧 다양한 명상 수행이다.

배경자아는 인식의 주체이며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를 늘 알아차리는 존재다.
배경자아는 그저 텅 비어 있고 고요하다.
그래서 평온하고 온전하다.
생각, 감정, 경험, 기억, 행위 등은 모두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일종의 소음이다.
감정도 생각도 경험도 넘어선 곳에, 모든 소음이 사라진 그곳에 고요함은 떠오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없었던 고요함이 새로 떠오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고요함은 원래 거기 그렇게 변함없이 있었고, 다만 소음이 고요함을 잠시 가렸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내면소통 명상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명상을 잘해내는가,
얼마만큼 생각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가,
무엇을 얼마나 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얼마나 놓아버릴 수 있는가,
얼마나 통제하고 조절하려는 의도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마음근력 훈련의 핵심은 늘 거기 그렇게 고요함으로 존재하는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고요함은 무엇을 애써서 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게 되면 오히려 시끄러운 소음만 생길 가능성이 크다.
고요함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할 때 떠오른다.
나의 고요함은 늘 거기 그대로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을 해내는 것이 명상이다.


(미포함 원고)
내면소통은 나와 나 자신과의 대화이며, 의식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뇌과학자들은 "나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보고할만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를 곧 의식으로 보고 있다.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 모델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끊임없이 올라오는 감각적 상태에 대해 생성질서로서의 내부상태가 지속적으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보고할 만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과정이 곧 내면소통이다.
어떠한 내면소통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고 내가 무엇인지가 결정된다.
내가 이야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나 자신을 결정한다.
내면소통은 자아와 관련해서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과정이다.
배경자아는 이러한 내면소통을 바라보는 존재다.
따라서 그것은 일상적인 의식보다는 한 차원 더 높고, 더 깊은 존재이며, 한 걸음 물러서서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다.
배경자아는 어떠한 행위를 하는 자아라기보다는 모든 행위를 관조하는 자아다.
내면소통의 내용과 작동방식을 알아차리기는 것은 배경자아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많은 내면소통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그러한 내면소통을 바라보지는 못한다. 그러한 내면소통과 내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나를 돌이켜보는 과정 없이 그저 내 의식이 생산해내는 끊임 없는 내면소통에 함몰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간다.
어쩌다가 간혹 자신의 내면소통을 돌이켜볼 때도 있으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꾸준히 알아차리며 바라보지는 못한다.
배경자아를 통해 내면소통을 꾸준히 바라보는 것이 명상의 본질이며 수행의 목표다.

(내면소통 736쪽)
배경자아가 고요함 자체임을 깨닫는 것은 베단타 철학식으로 말하자면 우주의 근본과 나의 본성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자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과 일체(unity)를 이루고 있음을,
나의 삶은 이미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차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깨달음은 항상 우리를 고요함으로 안내한다.
시끄러운 것은 언제나 에고(ego)의 모습일뿐이고 하나님은 늘 침묵으로 말씀하신다.
엘리야 선지자는 호렙산의 동굴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자연재해들을 목격한다.
먼저 엄청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태풍같은 바람 속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후에는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졌으나 그 지진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지진 후에는 거대한 불길이 일어났으나 그 불길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그러한 엄청난 소란이 다 지나간 후에야 미묘하고도 순수한 침묵의 소리 (kol demamah dakah)가 찾아왔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 고요함 속에 계셨다.
"kol"은 목소리 (voice), "demamah"는 침묵, 고요함(silence, stillness), "dakah"는 미세한 혹은 순수한 (thin, sheer)이라는 뜻이다 (Torresan, 2003).
하나님은 시끄러운 소음 속에 계시는 것이 아니다.
소음 속에는 고통과 번뇌와 괴로움이 있을 뿐이다.
고요함 속에 늘 평온함과 온전함과 지극한 행복이 있다.
하나님은 미묘하고도 섬세한 고요함 (delicate sound of silence)으로 존재하신다.
우리의 배경자아 역시 늘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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